신원사.
충남 공주 계룡산 자락에 있는 고찰이다.
계룡산의 정기가 서려있는 천황봉, 머리봉, 연천봉을 가장 빨리 접근할 수 있는 곳이라 자주 찾는다.
2014.11.8(토요일)
가을을 느끼려 신원사 거쳐 연천봉에 오르다.
신원사에서 바라본 연천봉(왼쪽)
중악단’(中嶽壇·)은 국가에서 계룡산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조선시대의 건축물이자, 제단이다. 계룡산은 예로부터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져 왔으며, 신라 때 5악의 하나로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북쪽의 묘향산을 상악으로, 남쪽의 지리산을 하악으로, 중앙의 계룡산을 중악으로 해 단을 모시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국가적인 산악 숭배처였다.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1394년 태조 이성계가 계룡단으로 창건해 산신 제사를 지내온 것이 중악단이었다. 그 후 성리학이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던 효종 2년(1651)에 미신 타파의 하나로 제단을 폐지했으나 고종 16년(1879)에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짓고 중악단이라 했다. 중악단은 현재 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신원사 안에 있다.
대전문화산업진흥원이 국내 최대의 산신각인 계룡산 중악단 재건과 명성황후와의 관계를 담은 고화질 다큐멘터리 시디를 제작해 17일 공개했다. ‘계룡산 중악단과 명성황후’라는 타이틀로 6개월간의 제작기간이 걸린 이 다큐는 중악단에 서린 명성황후의 흔적과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명성황후의 숨결을 재조명하고 있다.
명성황후는 중악단을 재건하고, 고종과 아들 순종의 만수무강과 조선의 국운 융성을 서원했다. 중악단은 건축적 개성도 뛰어나지만, 명성황후의 애절한 염원이 스며 있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기념물이기도 하다.
중악단 현판을 쓴 조선 후기 문인 이중하(1846~1917)는 청국과 영토회담 때, “목이 잘릴지언정 한 치의 땅도 내줄 수 없다”며 백두산 정계비의 토문강이 송화강이라 해 간도의 땅이 우리 영토임을 주장한 인물이다.(한겨레 뉴스에서 따옴)
수능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고득점 기원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철탑이 있는 천황봉은 군사보호구역이라 통제하고 있다.
연천봉에서 보는 관음봉과 삼불봉
쌀개봉과 천황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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